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후계자로 갑자기 언급된 옥타비아누스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으로 그 가문은 증조부 대부터 대대장, 로마 공행정 서기, 지방 행정관을 지낸 은행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바로 카이사르의 조카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였고, 외조모는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 카이사리스, 외조부는 폼페이우스의 고종사촌동생 아티우스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노부스 호모(신참자)로 법무관을 거쳐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가 네살에 불과했던 BC 59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던 중 객사했다. 친부가 40살도 되기도 전에 사망하자,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는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누나 옥타비아와 함께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에게 양육이 맡겨졌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12살이던 BC 51년, 유일한 보호자였던 외할머니마저 사망하면서 카이사르가 후견인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외가에는 더 이상 그를 돌봐줄 어른이 없어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가 살고 있던 집에 들어가 자랐다. 이때 그는 외종조부 카이사르 밑에서 군복무를 원했는데, 어머니와 계부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성년식 이후에는 군복무를 허락받아,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전한다.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당시에 옥타비아누스는 19세의 나이였는데, 외종조부의 명에 따라 동갑내기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로 떠나 함께 유학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자신이 제1상속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때 어머니와 계부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로마가 위험하니 돌아오지 말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로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대담하게도 비무장 상태를 유지한 채 친구 아그리파 등 극소수와 함께 이탈리아로 귀국 후 로마로 향했다. 이때 그는 로마로 귀국해, 안토니우스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키케로 등과도 접촉을 시도했다. 이는 그가 카이사르가 남긴 재산의 3분의 2를 상속받는 것보다 카이사르의 정치세력을 이어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카이사르의 측근 조차도 옥타비아누스를 카이사르가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는 키케로도 비슷했는데, 그는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햇병아리, 풋내기 등으로 불렸다. 어려움 끝에 옥타비아누스는 유언장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때 그는 카이사르 가문의 후계자가 되면서 관례에 따라 이름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카이사르로 지칭해 불렀다. 로마에 돌아온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없고 능력에 대한 검증도 부족했지만 카이사르의 병졸들은 그가 카이사르가 지목한 후계자라는 사실만으로 열렬히 지지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자금을 자신의 세력을 넓이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대담하게도 동방 속주에서 보내온 세금도 가로채어 카이사르의 병졸들에게 나누어지면서 그들의 환심을 샀다. 이로서 19세의 풋내기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어느덧 카이사르가 남긴 막대한 자금력과 병력을 모두 이어받은 세력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